RCEP 논평

타결인가, 연내 타결 무산인가?

어제 밤 정부 발표로 갑자기 RCEP이 타결되었다는 기사가 국내 언론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정부 발표 몇 시간 전만 해도 연내 타결이 무산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더니 왜 돌변했을까? 연내 타결 무산 보도는 공동성명서 초안을 입수한 AFP의 보도가 시작이었다. 공동성명서 초안에는 대부분의 시장 개방 협상이 끝났고 양자간 쟁점은 내년 2월까지 해소할 것이라는 문구(Most market access negotiations have been completed and the few outstanding bilateral issues will be resolved by Feb 2020)가 담겨 있었다. 이를 본 대부분의 언론은 RCEP 연내 타결 무산이라고 보도했다. 국내 언론도 이런 식의 보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밤 산통부가 협상 타결을 발표하면서 국내 언론의 보도가 180도 바뀐다. 산통부는 보도참고자료에서 “협상 타결” 대신 “협정문 타결”이라고 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15개국간 타결”이란 표현을 썼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는 있지만, “타결”에 방점을 둔 정부 발표가 있자 언론들은 더 취재도 하지 않고 협상 타결로 방향을 틀었다. 이어서 장밋빛 평가가 쏟아진다. 세계 최대 규모의 FTA 타결로 새로운 기회가 창출되었다거나 신남방 정책이 날개를 달았다는 홍보가 대표적이다. 정부의 이런 홍보를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먼저, 해외 언론들을 살펴보자. 국내 언론처럼 타결에 방점을 찍고 보도하는 예는 찾기 어렵다. 어제밤(11월 4일) 9시 54분발 일본 교도통신 기사 제목은 우리 언론과 정반대다: “RCEP 연내 타결을 단념했다는 공동성명”. 내용도 제목 그대로다. “[방콕 공동] 동아시아지역포괄적경제연합(RCEP) 수뇌회합은 4일,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목표로 했던 연내 타결을 단념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1시간쯤 뒤에 실린 요미우리 신문 온라인 기사도 “RCEP, 연내 타결 보류 … 인도는 참가하지 않기로”로 잡았다.

공동성명이 나온 직후 홍콩 언론(South China Morning Post)도 “7년이나 협상하고 아직도 타결못한 RCEP”을 제목으로 뽑았다.

기사 검색을 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뉴질랜드나 태국, 말레이시아 등 RCEP 협상 국가들 대부분의 언론들이 같은 논조의 기사를 내고 있다. 유독 한국만 장밋빛 타결 소식을 전하는 이유는 2가지다. 첫째, 우리 정부가 문재인 대통령의 성과 또는 협상에 참여했던 통상교섭본부의 성과로 치장하려고 타결 불발보다 타결 성공 쪽으로 보도자료를 냈기 때문이다. 둘째, 언론의 받아쓰기다. 이번 보도를 보면서 대한민국에는 RCEP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기자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협상이 5년을 넘기면서 ‘연내 타결’이 2017년부터 ‘연례 행사’가 되었지만, 타결 소식은 없었다. 올해는 해를 넘기면 더 이상 동력이 없어 RCEP 자체가 날아갈 판이였다. 그래서 올해 여름부터 그야말로 ‘초집중’ 협상을 이어갔다. 공식협상이 한달에 2번 열리는 초유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기를 쓰고도 인도가 빠지고 아직 미해결 쟁점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협상 타결이라고 쓰기 어렵다. 정부도 협상 타결이라고 하기는 민망했던지 “협정문 타결”이라고 표현했다. “협정문 타결”은 공동성명서의 이 문장 “15 RCEP Participating Countries have concluded text-based negotiations for all 20 chapters”에서 나왔다. 여기서 text-based negotiations을 근거로 산통부는 “협정문 타결”이라고 발표했는데, 협상 타결도 아니고 협정문 타결이란 말은 처음 들어본다. 이런 식의 조약 타결 방식은 없다. 어떻게든 타결이란 말을 집어넣고 싶어 만든 일종의 꼼수다.


새로운 기회 창출?

정부의 장밋빛 전망은 어떻게든 타결로 방향을 잡아야 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RCEP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협정일까? RCEP은 아세안 10개국과 아태지역 6개국(한중일, 인도, 뉴질랜드, 호주), 총 16개 나라가 참여하고 있다. 우리를 뺀 15개국 중 우리나라가 FTA를 체결하지 않은 곳은 한군데다. 바로 일본이다. 그럼 정부 말대로 RCEP이 타결되면,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과 처음 FTA를 맺는 결과다. 과거사 문제와 경제보복 조치가 이어지는 지금 우리가 일본과 FTA를 체결한다고? 생뚱맞다. 이걸 가지고 새로운 기회가 창출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신남방 정책이 날개를 달았다고 하지만, 아세안과 우리가 맺은 FTA는 12년 전인 2007년에 발효되었고 여러 차례 추가 개방을 했다. 아세안 회원국인 베트남과는 별도로 FTA까지 맺었다. 정부 발표만 봐도 한-아세안 FTA에 비해 RCEP에서 더 추가되는 것은 전자상거래와 지재권이다. 전자상거래를 두고, 정부는 “디지털 가치사슬 참여 촉진과 4차 산업혁명 관련 산업발전 가속화가 기대”된다고 하고, 지재권에 대해서는 “포괄적인 보호 규범 마련”, “저작권 보호 강화를 통해 RCEP 지역내 한류 콘텐츠의 안정적인 확산”을 기대치로 제시한다. 전자상거래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정부 여당이 추진하는 정책과 모순되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안다. IT 기업들이 요구하는 ‘디지털 자유’와 정책 주권이 충돌하는 묘한 지점에 전자상거래 협정문이 자리잡고 있다. 지재권은 한-아세안 FTA에는 없던 것이 추가되긴 했지만, 트립스-플러스가 아닌 다음에야 별로 달라질 일도 없다. 한류 확산도 저작권 조항 몇개로 달라질 일이 아니다(한류를 저작권에 기대 확산하겠다는 것은 더 문제다).


협상문안의 공개와 통상민주화

이제 정부가 할 일은 일방적인 홍보와 치적 내세우기가 아니라 협정문안과 협상자료의 공개다.[1] 이걸 공개해야 RCEP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지 객관적인 검증과 평가가 가능하다. 그리고 정부가 우리 사회 구성원 중 누구의 이해를 주로 반영하는 협상을 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국익’을 내세워 기업들의 이해를 편향적으로 반영해 왔다는 점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당시 이해당사자 의견 청취 내역만 봐도 드러난다.

2013년 12회, 2105년 3회, 2016년 2회에 걸쳐 철강, 화학, 기계, 자동차, 화학 등 산업계와 포럼을 했고, IT 분야, 유통업계, 제조업계 등과는 수도 없이 간단회를 해서 의견을 들었다. 이에 비해 노동자, 농민의 의견은 듣지 않았다. 시민단체 의견도 듣지 않겠다는 것을 겨우 설득해서 만났을 정도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도 통상관료들의 이런 편향적인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이제 이런 내역들도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통상 협상을 상품무역 중심의 산업적 시각이나 경제적 잣대로만 평가하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좀 더 포괄적인 사회경제문화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평가의 틀이 문제라면 인권 영향 평가를 도입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 통상 협정의 인권 영향 평가는 유엔에서 오랫동안 방법론을 연구해 왔고, 유럽연합은 몇년 전부터 인권 영향 평가를 실제로 해 오고 있다.

협정문안의 공개와 평가 방식의 혁신, 이것이 전제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통상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1] FTA 협정문이 서명 전에 공개된 사례로 TPP를 들 수 있다. 미국이 빠지기 전 TPP는 협상 타결 1개월 뒤인 2015년 11월 5일 협정문이 1차 공개되었다. 1차 공개본은 법률문안 작업을 하기 전에 공개된 것이었고, 최종본을 2차 공개했다. 한미 FTA도 이와 비슷한 절차를 거쳐 공개되었다.